우리나라 첫 선교사를 만나다(3) ‘한국의 친구’ 호머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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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잃은 유진 초이(이병헌)가 아버지와 같았던 요셉 선교사의 죽음을 목격하고 오열하는 모습. |
인기리에 방영중인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는 ‘선교사’가 극의 주요 흐름을 좌우했다. 종살이하던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은 어린 시절 쫓기다 선교사 ‘요셉’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해병대 대위이자 미 공사관 영사대리로 고국에 돌아온다.
그러다 선교사가 의병활동을 도우려다 죽음을 당하자,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던 주인공 유진은 진상을 파헤치면서 의병들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던 시대, 여자 주인공 ‘고애신(김태리)’는 선교사가 세운 학당에서 여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된다. 이들 외에도 구동매(유연석), 김희성(변요한), 쿠도 히나(김민정), 이완익(김의성) 등이 등장해 구한말 조선의 생활상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구한말 선교사들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던 조선인들에게 등불 같은 존재였다. 왕인 고종도 선교사들을 신뢰했고, 선교사들은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했다. 모처럼 대중매체에서 그 시대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보여주는 이 때, 구한말 목숨을 걸고 이 땅에 들어온 주요 선교사들의 이야기들을 책과 문헌, 영상 등으로 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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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선교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본지에 매주 연재되는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박욱주 박사(연세대)는 극중 ‘요셉’ 선교사의 실제 인물을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선교사로 지목했다.
개신교 선교사들 중 실제로 독립운동에 적극 나서 행동했거나 그 때문에 죽음을 맞은 인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각축장이던 일제강점기 이전 대한제국에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선교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역시, 큰 외교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기에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 헐버트 선교사는 가장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그리고 드라마 속 요셉 선교사처럼,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에게 면담을 시도했다. 때문에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한국의 친구’, ‘비전의 사람’이라고 돼 있다(Man of vision and Friend of Korea). 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도 불린다.
사실 그의 묘비에 적힌 글 중에는 이보다 유명한 문장이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그의 기일인 8월 5일이면, 매년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주최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는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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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의 요셉 선교사. 의병들을 도우려다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
오래 전택부 선생의 <양화진 선교사 열전>에 따르면, 헐버트 선교사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에서 미들베리대 총장을 지낸 아버지 캘빈 헐버트와 다트머스대 창립자 후손인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4년 뉴햄프셔 주 명문 다트마운트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 재학 당시 조선 조정의 정식 초청으로 1886년 6월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에 관립 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육영공원이 설립되자 8월부터 외국어 교사가 됐다.
그러나 1891년 육영공원 축소 운영으로 인해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3년 9월 미국 감리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들어왔다. 돌아온 그는 배재학당 내 삼문출판사를 중심으로 주로 문서선교에 관여하면서, 다양한 주제로 한국에 대한 글들을 발표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우리나라 YMCA의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903년 창설됐고, 그는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YMCA 창설 목적을 교육과 계몽, 선교 등 3가지로 구분해 설명했고, 이를 자신이 주간으로 있던 ‘코리아 리뷰’ 1903년 4월호에 게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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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내 헐버트 선교사의 묘.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는 글귀가 쓰여 있다. |
◈밀서 들고 미국으로… 밀사 되어 헤이그로
YMCA 창설 2년 후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돼, 우리나라는 외교권과 재정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앞서 미국 정부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권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야망을 묵인·방조하는 ‘가쓰라-태프트 비밀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주한 미국 공사였던 알렌은 이를 반대하다 본국으로 소환됐고, 국내 미국 선교사들 역시 미국 정부의 불의를 규탄하는 시민대회를 열었다.
이때 고종 황제는 미국에 밀사를 파송하고자 했는데, 발탁된 인물이 바로 헐버트였다. 헐버트는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는 동시에 대한제국을 구하려 했다.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조약 제1조에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제3국에 의해 침략을 당했을 때는 다른 일방은 이에 간섭하여 우호적으로 이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돼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국 밀사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헐버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준 열사의 자결’로 유명한 1907년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됐다. 미국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던 헐버트 선교사는 1906년 다시 우리나라를 찾아 고종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을 건의했다.
이후 대한제국 대표들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한 그의 역할은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 등 대한제국 특사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자문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밀사라고 발설함으로써 3인의 밀사를 보호하고자 했으며, 유럽 언론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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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요셉 선교사. |
그는 1909년 8월 한국에 돌아와 강제 퇴위당한 고종으로부터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해 둔 25만 달러 상당의 비자금을 찾아 안전한 은행으로 옮겨 달라는 밀명을 받았으나, 이 역시 일본 통감부의 간계로 결국 다 빼앗기고 말았다.
이 자금은 해외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비밀리에 마련해 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 상하이에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고종과 의병들의 극중 활동을 떠올리게 한다.
헐버트 선교사는 이 외에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개척자 역할도 수행했다. <한국사>, <한국망국사> 등 두 권의 저서를 집필했고, 훈민정음(한글)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소리글자’라고 극찬했다. 그는 육영공원 교사 시절 세계 각국의 산천·풍토·정령(政令)·학술 등을 한글로 간략하게 소개한 한국 최초의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쓰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에 의해 일본은 헐버트 선교사를 한국에서 추방했고, 이후 그는 프랑스와 스위스 등 유럽 각지를 방황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는 한동안 프랑스 YMCA 간사로도 일했다. 미국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정부의 대한 정책을 비판하며 한국을 끝까지 도왔다.
헐버트 선교사는 우리나라의 해방 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초청으로 84의 고령임에도 1949년 국빈 방한했다. 그는 위험한 여행길임에도 광복된 대한민국의 모습이 보고 싶어 무리하게 돌아왔다가, 1주일만인 8월 5일 소천한다. 그때 했던 유언이 바로 위에 소개한 묘비명,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였다. 그는 유언대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