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옮기니 고통은 이제 내것이 아니다 오경숙 피스메이커상담연구소장 “시·글쓰기는 치유다” <육필(肉筆)> “글씨는 뇌의 흔적이다.” 19세기 말 독일의 생리학자 빌헬름 프라이어의 말이다. 글씨에는 글쓴이의 표정이 새겨져 있다. 글쓴이의 성격이 묻어나고 그때그때의 기분과 정신이 녹아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꾹꾹 눌러쓴 손편지에 감동하는 것은, 그 안에 서린 누군가의 체취와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들어가 보자. 글을 쓰면서 감정을 분출하고, 발굴하며 묘사하고, 해부하며 전환할 수 있다. 종이에서 펜을 떼는 순간, 거기에 자신의 감정이 담긴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의 감정이 밖으로 나와 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게 한다면, 글쓰기는 감정 분출에 아주 효과적인 신체적 행위가 된다. 감정을 종이로 흘러가게 할 수 있다면 쓰면서 치유 받을 수 있다. 육필(肉筆)의 힘이다. 쓰면서 치유 받다 깨달음의 눈물이 영혼을 적실 때 상처 입은 영혼이 치유된다. 지난 10여년간 ‘시와 글쓰기 치유반’을 인도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온 오경숙(67·피스메이커 상담연구소) 소장은 “우울, 분노, 불안, 슬픔과 굶주림 등의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글쓰기는 놀라운 치료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한다. 특히 배우자나 자녀를 잃고 의사소통 능력이 멈춰버린 사람들에게 언어와 생각, 감정을 열어주는 소중한 창구가 됐다고 말했다.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내면적 상처와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배우자의 외도, 가족의 자살, 열등감 등 크나큰 상실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말하고 싶었지만 표현할 수 없던 감정을 글로 표현했다. 오 소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참석자들 대부분이 뚜렷한 치유를 경험했으며 그 치유의 속도는 제가 진행했던 어떤 상담과 치료 과정보다 빨랐다”고 했다. 40대 후반 K씨는 알코올중독 남편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었다. 남편의 욕설과 비난이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다 모임에 참석한 그는 오 소장이 인도하는 대로 ‘부치지 않는 편지’와 ‘자신에게 보내는 답시’를 썼다. 시와 편지를 읽고 쓰면서 차츰 힘을 얻었다. 수업 중에 그가 쓴 글이다. “참된 나를 볼 수 있다면,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확실히 다른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의미가 있고 차원이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시를 쓰면서 나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삶을 이기는 강인함을 배웠다. ‘비를 몰고 오는 동풍’ 속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됐다.” 50대 J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이 사고로 죽은 후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다가 회복 중에 있었다. 그는 10회 이상의 쓰기를 통해 아픔을 드러내며 치유를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모든 현실이 깜깜했고, 날마다 찾아오는 무기력과 공허감은 나를 꼼작 못하도록 짓눌렀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내가 나를 학대하며 괴롭히는 일이었다. … 그러나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감사나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내 환경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 나는 말할 수 없는 큰 고통과 절망 중에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자녀였고 귀한 존재임을 알게 됐다.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위로를 듣고 (느낌을) 쓰면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알게 됐다. 10회 이상 아들에게 보내는 글, 그리고 답글, 주님께 보내는 편지와 답장을 쓰면서 나는 다시 회복됐고 ‘감사’라는 가슴의 말을 찾게 됐다.” 마음속 아픔을 다 꺼내 보여주었을 때 진심어린 위로와 격려를 받은 참석자들은 마음의 힘을 얻게 된다. 쓰기 치유는 영성으로의 다리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깊건 그렇지 않건 상처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글쓰기를 통해 밖으로 꺼내놓고 객관화한다면 상처는 점차 희미해진다. 쓰기 치유는 이런 자신 안의 해결돼야 할 문제나 갈등을 직면해,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글쓰기 과정에서 치료를 경험한다는 점이 일반적인 글쓰기와 다르다. 내면의 상처를 회복하고 한층 더 성숙한 의식을 갖기 위해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이 바로 쓰기 치유다. 일기장에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 나만의 비밀을 털어놓았던 경험을 떠올리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안네 프랑크(1929∼45)는 1941년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2년 동안 작은 다락방에 숨어 지냈다. 안네는 13세 때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공포와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안타까움 등을 적었다. 안네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원했던 삶을 대신한 것은 일기였다. 이것이 암담한 그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됐다. 이것이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는 ‘안네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온다. 기억은 현재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 불안 두려움 근심 의심과 같은 감정으로 나타난다. 이런 감정이 상처를 주는 이유는 대부분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고 없이 돌출된다. 잊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일수록 내면 더 깊은 곳에 억압되어 잠재의식의 한구석에 깊이 숨겨진다. 사람들은 그 기억을 잊었다고 생각한다. 치료받아야 할 기억이 있음을 알이지 못한다. 내가 현재 느끼는 감정은 기억과 연관돼 있다. 헨리 나우웬이 말했듯이 “후회는 쓰라린 추억이고 죄책감은 절망적인 추억이며 감사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추억”이다. 기억으로 인한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정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만약 갈등을 겪고 있는 인간관계가 있다면 쓰기 치유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감정들을 쏟아내는 안전한 토론의 장을 제공할 수 있다. 직장 상사에게 욕을 퍼부을 수도 있고, 엄마에게 비명을 지를 수도 있으며, 속이 후련하도록 남편이나 아내에게 소리칠 수도 있다. 이렇게 다 쓰고 나면 감정을 다 쏟아내게 돼 실제 대화를 할 때 이성을 잃는 일 없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대화할 수 있게 해 준다. 쓰기 치유에는 어떤 규칙도 없다. 철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법이 틀려도 무방하다. 글씨체도 문제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평가받을 필요도 없다. 용기가 나면 노트 한 권을 준비하면 된다. 노트를 펼치기 전에 심호흡이나 기지개 켜기, 묵상을 한다. 심호흡을 할 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공기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느껴본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고백, 혹은 편지를 쓰듯이 기록해본다. 현재의 감정이나 생각을 정제하지 않고 모조리 쓰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직면이 곧 치유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을 글로 써 다시 읽는다. ‘이제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쓰기 치유’는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분노 성폭력 등과 같은 심리적 상처의 치료는 물론 감정을 통제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이미 입증됐다. 미국 텍사스대학 제임스 페니베이커 교수는 1980년대 후반에 성범죄 피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글쓰기가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했다. 절망의 늪에 깊이 빠져 있던 피해 여성들이 글쓰기를 통해 구원의 밧줄을 잡을 수 있었다. 노트에 깨알같이 쏟아낸 단어들이 눈물로 흠뻑 젖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피해 여성들은 악몽의 껍데기를 한 겹 한 겹 벗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쓰기 치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강점과 자원을 찾아 숨겨진 자아와 억압된 자아를 새로이 발견하고 그에 대한 깊은 애정과 돌봄을 통해 참 자기를 발견해 나가고 성장시켜 나가는 자기발견의 긴 회복 여행, 즉 치료 여행이다. 쓰기 치유의 출발 쓰기 치유는 작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간단한 질문 중 하나를 선택해 글쓰기의 문을 열 수 있다. ‘오늘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일은 무엇인가’ ‘오늘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일은 무엇인가’ ‘오늘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써본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당신을 깊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쓴다. 또 다른 방법은 편지 형식으로 쓰는 것이다. 외로움, 원망의 생각, 분노의 감정, 절망감, 무너져버린 꿈, 미움과 상처,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도 다 적는다. 그러고 여러 번 그 감정을 느끼며 읽어본다. 주님이 옆에 계신다고 생각해도 좋고, 비록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나를 이해해주었던 과거의 누군가가 옆에 있다고 가정해도 좋다. 이렇게까지만 해도 감정의 흐름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느린 속도만큼 생각이 머물고 익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준다. 또 나를 기분 좋게 해 주는 리스트를 만든다. 노래 가사 한 줄, 성경 구절, 명언,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풍경 등 긍정적인 사고를 강화시키는 것 열두 가지를 천천히 써 본다. *출발을 돕기 위한 질문 -오늘은 내 나이가 꼭 ~살처럼 느껴진다. -나는 ~할 때 너무나 신이 난다. -내가 (오늘, 이번 주, 올해, 생애동안) 꼭 이루고 싶은 것 세 가지는~이다. -나의 인생(사업, 인간관계, 직업 등) 여정에서 난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지금 내 기분은 어떠한가. -나는 ~때 가장 행복하다. -무엇이 나의 흥미를 잃게 하는가. -나는 ~때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왜 이렇게 화가 날까(슬플까, 겁에 질린 걸까 등).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지현 선임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170409&code=61221111&sid1=ch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