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찬송 :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369장(통 48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누가복음 11장 1∼13절 말씀 : 인격이든 건강이든 직업이든 어떤 일에 탁월한 사람을 보면 비결이 궁금해집니다. 기도를 마치고 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인 탁월함의 비결이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함에 있음을 눈치채고 주께 부탁합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세요.’ 예수님은 2~4절에서 기도의 내용을, 5~13절에서는 두 개의 비유로 기도하는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아쉽게도 개역 개정 성경이 8절에서의 내용 중 ‘간청함’이라고 번역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도에 대해 오해가 생기고 ‘간청하는 기도’란 표현도 생겼습니다. 중동 문화에서 손님 접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밤중 찾아온 친구의 경우 대접할 손대지 않은 새 떡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날 화덕에서 떡을 구운 것으로 아는 자신의 친구 집 문을 두드립니다. 그 손님은 마을주민 모두의 손님이기도 하기에 미안한 마음을 접어두고 두드린 것입니다. 그렇긴 해도 누가 그런 상황에서 달갑게 문을 열고 음식을 챙겨주겠습니까. 속으로 ‘이 사람아, 지금이 몇 시야! 불도 켜야 하고 문빗장 여는 소리에 애들이 다 깨겠네. 날이 밝으면 오게!’라고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으로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고 하십니다. 문제는 ‘간청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신약성경에 단 한 번 사용되고, 신약성서 밖에선 ‘뻔뻔함’ ‘수치를 모름’이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또 이 상황에서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매일 찾아가는 과부처럼(눅 18장) 여러 번 문을 두드리지도 않습니다. ‘뻔뻔함’ 때문에 문을 열어 주고 우리가 뻔뻔하게 기도해야 응답한다는 말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당시 문화적 정황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서라도 청을 무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다른 집 문을 두드릴 게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온 동네가 잠을 깰 것이고 다음날 자녀를 핑계로 책임을 회피한 이 사람은 몰염치한 인간으로 낙인이 찍힐 판입니다. 비록 우정은 귀찮음을 무릅쓰게 할지 못할지라도 주변에 ‘뻔뻔한 놈’이란 말 듣는 것이 두려워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그런 상황이면 체면 유지를 위해 그 정도는 한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더 주시겠니?(13절) 그러니 너희는 확신을 갖고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9절)’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정도에 비례해 우리의 기도는 간절하고 진실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길 바라십니다. 한밤중에 귀찮지만 체면 때문에 일어나는 철면피 이웃이나, 악해도 자식에게는 제일 좋은 것만을 고집하는 부모(13절)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선하고 지혜로우며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께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우리에게 다른 무엇보다 귀중한 선물을 부어주십니다.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입니다. 기도 : 자비하신 아버지, 오래 주문을 중얼거리는 이방 사람이나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떼쓰는 아이처럼 철없는 기도자가 되지 말게 하소서.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를 믿고 순종했던 예수님처럼 저희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빚으시는 것을 믿고 기도로 더욱 가까워지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효종 목사(안성 예수사랑루터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1275&code=23111511&sid1=f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