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하나님 앞에서 찬송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585장(통 384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도행전 4장 13~22절 말씀 :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구약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문제를 지적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성당 문에 붙였습니다. 사실 루터는 이 반박문이 가져올 엄청난 파장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 일은 거대한 태풍이 되어 유럽 전역에 거대한 종교개혁의 바람을 불어 일으켰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개신교가 탄생했습니다. 개신교(改新敎)를 가리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항의하는 사람들’ 혹은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16세기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의 그릇된 교리와 낡은 권위의식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지어졌지만, 훗날 개신교인들은 이 뜻을 자랑스럽게 여겨 오늘날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개신교는 무엇을 저항하고 있는 걸까요. 오히려 개신교가 세상의 저항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본문은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전하다가 체포되어 밤새도록 갇혀 있다가 이튿날 예루살렘 공회에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는 것입니다. 전에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며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베드로였다면 분명 말 한마디 못하고 머뭇거리고 주저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베드로는 전혀 다릅니다. 8절엔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라며 아주 담대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인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전하는 모습에 공회원들이 너무 놀라 비난할 말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13~14절) 온갖 거짓과 불의, 위선과 외식으로 얼룩진 예루살렘은 이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대로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16~17절)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신앙은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눈치나 보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1521년 4월 17일 보름스로 간 루터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만류하는 가운데 재판정에 선 루터는 살기등등한 눈빛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Oh, God, here I stand).” 죽은 자는 프로테스탄트가 될 수 없습니다. 저항은 산 자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가 저항할 수 없다면 산 것이 아닌 죽어 있거나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아무리 커도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아도 살아 있다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도 : 주님, 주님 앞에 늘 서 있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에 주눅 들어 주님을 부인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게 하소서. 늘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04191&code=23111511&sid1=f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