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두 종류의 말씀 찬송 : ‘구원으로 인도하는’ 521장(통 253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예레미야 23장 16~29절 말씀 : 사도 바울은 믿음이 말씀을 듣는 것에서 난다고 말합니다.(롬 10:17) 말씀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상대에게 믿음이 생기게 돕는 방편인 셈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천사’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전달자에 해당하는 용어가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굳이 들추지 않아도 세상엔 극단에 치우친 잘못된 설교자가 꽤 있습니다. 하나는 지옥의 형벌 등 율법적인 설교로 성도를 노예 삼는 경우입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가족을 와해시키는 이단 집단의 우두머리가 대표적입니다. 다른 하나는 듣기 좋은 말만 해 성도의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세속화시키는 경우입니다. 본문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당시 남유다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예레미야는 북이스라엘이 아수르에 망한 주전 722년 이후에서 남유다가 바벨론에 망한 주전 586년 이전에 주로 활동했습니다. 사이가 좋진 않았으나 어쨌든 같은 민족이던 북이스라엘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을 지켜본 남유다 백성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을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거짓 설교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평안을 말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우상을 섬겼지만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했다. 우리에겐 여호와의 성전과 율법, 하나님의 언약도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탈하게 지켜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메시지를 환영한 사람이 ‘(하나님을) 항상 멸시하는 자’ ‘자기 마음에 완악한 대로 행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17절) 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평안의 약속이 아니라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하는 말씀이었습니다.(22절) 하나님은 평화를 전하는 설교자가 천상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는 이들이라고 두 차례나 지적합니다.(18, 22절) 한마디로 그런 내용은 천상 회의록에 없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두 가지의 말씀을 마주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씀’과 ‘내가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경제·정치·국제·환경 분야가 전반적으로 어렵습니다. 교회에서 소망과 위안을 주는 말씀을 듣길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듣고 싶은 말씀보다 들어야 하는 말씀이 우선입니다. 뇌경색 전조 현상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두통이니 염려 말라는 의사의 진단이 우선은 듣기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의 골든타임은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그리스도로 믿은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43)라고 순종의 마음으로 고백하듯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내가 듣고 싶은 말씀과 들어야 할 말씀을 구분하는 보석 같은 지혜가 우리 안에 자랄 것입니다. 또 하나님 말씀이 점점 내 심령을 강건하게 세울 것입니다. 기도 : 이 나라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한국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말씀을 예비했습니까. 우둔한 마음을 열고 듣고 깨닫는 은혜를 공적 예배를 통해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의 참 생명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4366&code=23111511&sid1=fai |